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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했다.
서초동은 원래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서초리와 명달리로 칭해오던 곳 이었는데 일제강점기 구역확정때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로 칭하게 되었 고, 광복후 1963년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초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잠원동

현재 농가공산품판매센터(잠원동 65-32번지)부근에는 할떡거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반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 성당 뒤쪽에 있다.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예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
잠원동은 이곳에 조선초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잠실리라 부르던 것을 서울에 편입될 때에는 이미 현 송파 구에 잠실동이 있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잠」자와 인근 신동 면 신원리의「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잠원동의 연 혁을 살펴보면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부르던 곳이다. 그런데 일제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확정 때에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했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반포동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른다하여「서릿개」곧 반포(蟠浦)라 하다가 훈이 변하여 반포(盤浦)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는 홍수 피해를 입는 상습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으나 일제때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방배동

방배동의 유래는 관악구와 서초구와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 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을 방배라한데서 연유한다. 방배동 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 으나 일제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 확정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의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방배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위치는 서초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이며 서울에서 과천에 이르는 도로와 남부순환 로가 교차하는 곳에서 우면산에 이르는 지역이다.

양재동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하여 지은 동명으로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의 양재동이라 칭해오던 것 을 일재때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로 정하고 광북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이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예전에 교통의 요지로 말죽거리로 애칭되었으 며,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으로, 양재천 연안의 농경지가 있어 벼농사가 행해졌던 중심지였는데,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택지로 조성되었다. 옛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양재역, 양재원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주요 상업지역이었다.

우면동

우면동은 우면산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유대된 동명 으로 이 동의 위치는 서쪽은 방배와 남쪽은 양재천 경계 로 과천과 접하고 북쪽은 양재동과 접하는 곳으로, 약 270년 전부터 윗우마니, 아랫우마니 등 12개 마을로 형성된 동이었으나 1970년대 초 경부고속도로 건설이후 시작된 강남지역의 개발과 아울러 현대식 양옥이건립되고 여러 연구기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원지동

院趾洞은 朝鮮時代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역과 함께 설치되었던 院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院址라고 하던 것이 잘못 표기되어 院趾洞이 되었다 한다.
원지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신원동으로 칭해왔다. 그런데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임의로 조정하면서 이곳을 시흥군 신동면 신원리라고 칭했다.
그리고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1962.11.21 공포)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현재의 신원동과 분리하여 바람골, 양수리, 원터마을의 3개 부락을 원지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1973년 서울특별시 영동출장서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내곡동

내곡동은 옛 언주면의 일부로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안골·안말로 불리우던 것이 한자명으로내곡동이라 된 것이다. 현재의 위치는 강남구 남쪽의 구룡산, 대모산의 성남시와 분계되는 인릉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안골을 위시하여 샘마을, 능안마을, 헌인마을, 홍씨마을, 신흥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산재해 있다.
옛 언주면의 일부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을 한자명으로 내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 동명의 유래인데,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헌·인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여우 등의 짐승이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내곡동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에 인릉산은 내곡동고 성남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내곡동 산 13-1번지에 헌릉·인릉이 자리잡고 있어 산 이름이 되었다.

염곡동

九龍山이 감싸안은 廉谷洞은 이 곳 지형이 염통(심장)과 같이 생겼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영통곡(靈通谷), 염곡동(廉谷洞)이라 하였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彦州面 廉谷洞으로 칭해왔다가 1914년 염통골의 이름을 다서 광주군 언주면 廉谷里라 칭하였고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염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서울특별시 영동출장서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약 500여년 전부터 全州李氏가 거주를 시작했고, 20여년 이후 거주한 新羅 眞骨 창녕(昌寧) 조(曺)씨들이 90여 가구로 번창한 집성촌으로, 마을전체가 돌담이며 감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8군데가 매몰되고 ,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우물만이 남아 있다.
이 옻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 물을 마시거나 우물 울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탑성골(塔谷)은 옛날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염통골에 속한 마을이며, 염곡리는 피난골이라고도 부르는데 6·25 전쟁 당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염곡동 언남공원에 570년된 느티나무 서울시지정 보호수22-1, 22-2 가 있어. 이곳에서 주민들이 국가의 안녕과 마을에 악귀를 멀리 쫓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를 지냈다 한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전 가옥이 현대식 주택으로 변모되었지만 예전의 전원 모습을 그래로 지니고 있는 동이다. 염곡동은 이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염통곡, 염곡동이라 하였다. 염곡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은 내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양재동에 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은 구룡산을 경계로 강남구 포이동과 분계되어 있고, 남쪽은 야산을 경계로 신원동과 잇대어 있다.

신원동

신원동은 조선시대 원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이므로 「새원」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신원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은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원동, 신저도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전면 조정하면서 이 때 이곳을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라 칭하였다.
광복후 1963년 1월 1일 법뷸 제1172호(1962.11.21 공포)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원동의 행정동 변천관계를 살펴보면, 이 동은 1962년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관할이었다.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는 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에 의해 신설된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할의 탑곡동사무소는 신원동과 함께 염곡·내곡동의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서초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고, 도로변에는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꽃과 관상수를 재배하는 100여개의 화원이 자리잡고 있다.
신원동의 지정 보호수인 수령 100년의 느티나무는 이 마을 사람들 뿐아니라 서울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개 위해 역과 함께 각 요로에 설치되었던 원의 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새원" 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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